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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Glycine Watches SA History & Timeline


Timeline of Bienne made Glycine watches, the evolution of watchmaking from 1914 to 2020

Glycine Watches SA owners

  • 1914 - 1916 유진 메일런 (Eugène Meylan) 
  • 1916 - 1924 유진 메일런, 피콜라&조프렛 (Eugène Meylan and Piccola & Jofrette) 
  • 1924 - 1943 페르난도 엥겔 데지빌 (Fernand Engel d'Eggiwil)
  • 1943 - 1965 찰스 허티그 에빌라르 (Charles Hertig d'Evilard) 
  • 1965 - 1984 찰스 허티그 Jr & 사무엘 글러 (Charles Hertig Jr & Samuel Glur)
  • 1984 - 2011 한스 브레히블러 (Hans Brechbuhler) 
  • 2011 - 2016 스테판 렉 (Stephan Lack )'13-'15 DKSH
  • 2016 -  현재  인빅타 그룹 Invicta Watch Group 

Glycine History 1914 - 1942


Glycine Watches SA의 창립, 초기 오토매틱 시계와 2차 세계 대전

GLYCINE WATCHES HISTORY AND TIMELINE 1914-1942


Eugene Meylan, founder of Glycine Watch Company, 1914

엔지니어인 아서 루이스 유진 메일런 (Arthur Louis Eugene Meylan)은 (1891년 10월 17일 출생, 르 체니트 (Le Chenit), 1955년 9월 23일 사망) 1910년과 1911년에 걸쳐 워치메이킹 학교를 수료합니다.

  Company Creation  

글라이신의 역사는 1914년 5월 20일 

유진 메일런 (Eugene Meylan)에 의해 시작됩니다. 


메일런 (Meylan)은 주소 Route de Boujean 50a에 

'Fabrique d' Horlogerie La Glycine'을 설립했으며 


1914년 9월 1일 비엔(Bienne)의 주소 Chemin de la Champagne 1a로

회사를 이전한다는 쪽지를 남긴 후 회사를 이전합니다.


  The first decade  


1914년에 설립된 글라이신은 1930년대 중반까지 소형 무브먼트를 전문적으로 생산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최초 기록된 글라이신의 발자취는 1914년 7월 18일, 13개의 무브먼트 모델을 등록한 것 이었고 1915년 12월 23일, 공장 건물의 배경과 함께 여러 무브먼트를 야심차게 선보인 글라이신의 첫 광고는 스위스 연대기(Swiss chronicles)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La Glycine P&J  

[글라이신 최초의 로고]
[글라이신 최초의 로고]

글라이신 로고의 초기 모습은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모습과는 달랐는데 깃발에 라 글라이신 (La Glycine) 이니셜이 교차되어 있는 형태였습니다. 

비엔(Bienne)의 워치메이커인 피콜라(Piccola)와 조프렛(Jofrette)은 1916년 부터1923년까지 회사의 주주가 된 유진 메일런(Eugene Meylan)과 파트너쉽을 맺었습니다. 


1924년 메일런(Meylan)은 페르난도 앵겔 데지빌(Fernand Engel d' Eggiwil)에게 라 글라이신의 생산 공장을 매각했습니다.

프레토 와치 "Pretto Watch C"의 대표이사인 엥겔(Engel)은 당시 워치메이커와 기술자들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스위스 은행과의 워치메이커를 위한 대출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였습니다. 

앵겔(Engel)은 라 글라이신(La Glycine), 프레토 와치(Pretto Watch C) 두 회사를 대표해 "Glycine Watch Factory et Pretto Watch Co SA"라는 법인으로 대출 분야를 전담했고, 글라이신 (Glycine)의 마케팅에도 공헌을 했으며 이 후 메일런(Meylan)의 Automatic EMSA 대량 생산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Chronometer Grade movements  


첫 10년 동안 글라이신은 5개의 제조 라인으로 소형무브먼트를 생산하며 완벽한 품질을 추구하였습니다. 

바게트 형태의 무브먼트를 최초로 개발해 특허를 등록했고 이 바케트 형태의 무브먼트는 1923년과 1926년 크로노미터 (Chronometer) 등급의 무브먼트로 선정되었습니다.

EARLY GLYCINE ADS 1914 - 1926


Vintage Glycine Watches

EUGENE MEYLAN AND HIS BREAKTHROUGH : EMSA AUTOMATIC


  1930  

  Eugene Meylan and his business ventures  


유진 메일런 (Eugène Meylan)은 훌륭한 기업가입니다.

1924년 유진 메일런은 페르난도 엥겔(Fernand Engel)에게 글라이신을 매각 한 후 다른 여러 법인을 설립하고 다양한 워치메이커 및 업계 전문가와 협력했고 관계를 맺었습니다.

1926년 메일런(Meylan)은 'Fabrique de Sertissages Precis'.( 'Eugène Meylan, Le Chaux de Fonds'로도 알려져 있다.) 법인을 설립하였습니다.

'Fabrique de Sertissages Precis' 가 시장에 시계를 선보인 기간이 5년(1926-1931)이라는 짧은 시간이었고, 그 이유로 다이얼 마크 'Eugène Meylan, Le Chaux de Fonds'가 새겨져 있는 시계는 현재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1930년 메일런(Meylan)은 'EMSA 오토매틱'을 발명하였고 이 발명은 업계 판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당시 특허를 보호하고 발명을 상업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꽤나 도전적인 일이었고, 이미 Harwood's hammer automatic 특허가 등록되어 있어 1931년 까지 시장의 경쟁을 제한되었습니다. 당시 최소 여섯 개 이상의 회사가 다양한 자동 와인딩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1931년 Harwood 특허가 만료되자 예상한 대로 자동 와인딩 메커니즘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계의 모든 부품, 심지어 움직이는 부품이 아니더라도 태엽을 감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러그, 케이스 백, 레일의 전체 케이스, 진자, 시소 케이스, 볼 베어링의 매력적인 움직임을 상상해 보면 이 시대의 상상력과 공학 엔지니어링은 가히 매혹적이었습니다.


이 시기 메일런 (Meylan) 자동 모듈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1930년 10월 'Chronomuri Watches SA'라는 회사를 인수하고 'Automatic EMSA'로 회사명을 변경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생산과 유통 채널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일런은 오토매틱 시계를 대량 생산하고자 하였으나, Sertissages의 수입과 'Bulle' 시계 만으로는 자금적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후원자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Bulle clock는 영구자석과 전기코일의 반응에 기초하여 전자시계로 분류 1914년 프랑스에서 설립되었으며 제네바에서 Meylan이 유통.


이 때 메일런은 다시 글라이신(Glycine)으로 눈을 돌렸고 당시 글라이신 (Glycine)의 소유자인 페르난도 엥겔(Fernand Engel)은 조지 핸리(Georges Henry)에게 찾아가 'Automatic EMSA'의 후원자가 되길 요청하였고 마침내 후원자를 찾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핸리(Henry) 역시 이 계기로 자동 와인딩 메커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후 오토매틱 시계에 대한 해외 특허(미국)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워치메이커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명가로서의 핸리(Henry)의 이름은 미국 내 특허에 여러 회사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Autorem(1934년 Universal Watch Co. Pat. US1973898)

Meyer Stuedeli(1935년 이 후 Roamer US2013386)


글라이신(Glycine)의 소유주인 앵겔(Engel)은 당시 워치 메이커 조합 이사회의 임원이었는데 메일런(Meylan)의 자동 모듈의 특허를 보호했고, 이 기술을 불법적으로 타인이 사용하는 점에 대해 매체를 경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메일런(Meylan)은 1935년에 자신의 특허를 글라이신(Glycine)에 매각해 더 많은 기회를 얻었고 'Bulle Clock'의 사업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1931년에서 1935년 사이에 제조된 글라이신 오토매틱(Glycine Automatics) 무브먼트에 새겨진 마크가 전부 상이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메일런(Meylan)이 제조한 초기 무브먼트에는 'Automatic EMSA' 마크, 

앵겔(Engel)의 재정 지원 이후의 마크는 'Glycine EMSA Automatic'

1935년 이후에는 'Glycine Automatic' 마크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진 메일런(Eugène Meylan)은 진정한 기업가였으며 비즈니스 행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1910 - l'Ecole d'horlogerie , Le Chaux de Fonds

1914 - Eugène Meylan, Fabrique d'Horlogerie 'La Glycine' 설립

1918 - Meylan과 Henri Jeanerret이 함께 Sonex SA 설립, 1925년까지 활동 기록 보유

1926 - Meylan 'Eugene Meylan, Le Chaux de Fonds'로도 알려진 Fabrique de Sertissages Precis 회사 설립

1927 - Sertissages 'Precis' - Eugène Meylan 스위스의 'Bulle Clocks' 대표 이사직 역임

1930 - Glycine Doxa 및 Meyer & Stuedeli와 함께 독일에서 네트워크 'Medex' 설립

1930 - Eugène Meylan 회사 'Chronomuri SA' 인수, Automatic EMSA로 이름 변경

1931 - 자동 모듈 특허가 'Eugene Meylan - Le Chaux de Fonds' 회사에서 'Automatic EMSA' 회사로 이전

1935 - Eugène Meylan 글라이신에 특허 양도

1936 - Eugène Meylan Fabrique de Sertissages 'Precis' 회사 재 설립 'Bulle Clocks'의 대표성 회복

1947 - 스위스 연방 의회에서 사업 범위 내 그의 활동을 인정한다는 판결 받음

1955 - 9월 23일 금요일, Eugene Meylan 사망

  The Automatic Module EMSA  

EMSA 오토매틱 손목시계, Cal 40이 새겨진 두 개의 회중시계,La Chaux de Fonds의 Eugene Meylan 이 서명한 여행용 알람 시계입니다.

  Eugene Meylan timepieces  

Eugene Meylan timepieces 모든 수동 와인딩에 장착할 수 있는 이 모듈은 8,75 라인 무브먼트를 오토매틱 무브먼트로 만들어줍니다

EUGENE MEYLAN AND GLYCINE WATCHES.

  The movement and the module  

1930년 10월 15일 메일런(Meylan)은 EMSA 오토매틱 모듈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당시 시대상은 John Harwood가 발명하고 특허를 출원한 Harwood와 Autorist는 이미 산업 규모로 제조 유통되고 있었고 이에 의해 오토매틱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모듈 개발 부분에서 시계 회사 간 경쟁이 매우 치열한 시기였습니다. (메일런)Meylan의 특허는 Harwood의 특허와 공존할 수 있는 세 번째 산업 규모의 오토매틱 시계의 발명이었습니다.

  Functionality  

위 사진의 독립적인 EMSA 모듈은 모든 8,75라인 수동 와인딩 무브먼트에 호환, 적용될 수 있었고 이 모듈을 장착하면 수동 무브먼트가 자동 무브먼트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The Glycine EMSA automatic module  

당시 유일한 오토매틱 시계인 Harwood와 Autorist를 수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메일런 (Meylan) 자동 모듈을 무브먼트에서 분리한다는 점에 착안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었습니다.


  EMSA Automatic in New York  

  World Fair 1939  

유진 메일런(Eugene Meylan)과 글라이신(Glycine)은 마케팅 활동을 시작했으며 바젤 페어(Basel Fair)에서 셀프 와인딩 시계를 선보였습니다. 또한 1939년 글라이신 유진 메일런(Glycine Eugene Meylan Automatic)은 충격 및 방수, 항자성, 자동 와인딩을 지원하는 시계를 뉴욕 세계 박람회(New York World Fair)에 선보였습니다.

  EMSA Sports Automatic  


자동 와인딩 기능, 충격 방지 및 방수 기능을 갖춘 이 견고한 시계는 당시 가장 이상적인 스포츠 시계가 되었습니다.

  EMSA Patent  


1930년 10월 15일 자동 모듈 특허를 출원하였으며 1931년 11월 16일에 특허가 등록되었습니다. 


EUGENE MEYLAN TIMEPIECES AND ADS, 1926-1931

Glycine History 1942 - 1984


The Golden decades of Glycine Watches: 

Glycine Airman and its Space Flight with Gemini 5, Glycine Vacuum, Glycine Airman SST,

Glycine Combat models introduction

GLYCINE WATCHES HISTORY AND TIMELINE 1942-1984

ASUAG

1942년 "ASUAG"는 글라이신(Glycine)의 ebauche 사업부를 인수하였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인하우스 무브먼트 시대의 종말을 알렸습니다.


"ASUAG"는 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 (Swiss Watch Industry Group)의 약자로, 1931년 대공황으로부터 스위스 시계 제조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스위스 정부와 은행의 후원 하에 설립된 법인이었으며 오늘날의 스와치 그룹의 전신입니다.


1942년 당시 ASUAG는 많은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Champagne, Derby, Precimax, Gigantic, Glycine, Eterna, ETA, Arsa, Manzoni, Moser, Peseux, Fleurier, Kummer, Hora, Sonceboz and Charles Hahn, Landeron, Felsa, Venus, Root, Bovet, Optima, Postala and Urania, Adolphe Michel, Fontainemelon (FHF), Valjoux and A.Schild.


1942년 부터 쿼츠 파동까지 글라이신의 아틀리에 공장은 "ASUAG"의 규모형 시계 제조 공장 일부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생산된 글라이신 시계는 글라이신 무브먼트 대신 ETA, AS 및 Felsa 칼리버로 구동됩니다.

F690 Bidynator and Glycine


"ASUAG"의 Felsa 690 Bidynator 무브먼트 개발은 글라이신(Glycine) 아틀리에 공장을 인수한 이후 가장 돋보였던 성과입니다.


"ASUAG"의 자금력과 노하우에 글라이신(Glycine)의 오토매틱 무브먼트 제조 경험이 더해져 최초의 양 방향 와인딩 로터인 Bidynator를 개발하였습니다.



GLYCINE VINTAGE WATCHES 1942-1984

  WW II era 1938-1944  

세계 경제 대 공황 이 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시계 산업은 매우 전도 유망한 산업이었습니다. 포인터, 날짜, 손목 크로노그래프, 오토매틱 시계 등 다양한 상품이 시장에 활발히 출시 되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수 많은 시계 회사들은 자국과 동맹 국가 혹은 축국을 위한 시계를 제조 했으며 어떤 회사는 양측에 전부 시계를 공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공급된 가장 유명한 시계 세트 로는 12개의 시계 묶음으로 구성된 “The dirty dozen” 시계 세트였는데 당시 전쟁을 하는 전 세계 국가에게 판매 되었습니다. 이 세트는 현재 수 많은 시계 수집가들이 원하는 컬렉션 중 하나입니다.

글라이신은 “Land forces timepieces” 타임피스 세트를 주로 독일에서 주문을 받아 군에 공급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글라이신에서 만든 DH(Deutsches Heer) 라는 독일군의 시계이며, 케이스 백에 DH문자와 5,6자리 숫자로 조합된 시리얼 넘버가 새겨져 있습니다.

견고한 내구성이 특징인 무브먼트  AS113(일명 Wehrmarchtswerk 군용 무브먼트)가 시계를 구동하며, 당시 모든 시계에 특정 표시와 사양이 마킹되어 있습니다.

밀리터리 워치는 현재까지도 마케팅에 큰 축을 차지하는 영역으로 시계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각 국의 정부가 거의 모든 시계 주문을 담당했습니다.

  War is over, but Radium not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워치 엔지니어 공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워치 메이커들은 매우 창의적이었고, 그 중 글라이신은 자신만의 영역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위 사진은 FHF175 무브먼트가 구동하는 요일, 날짜, 월이 표시된 트리플 캘린더 글라이신 시계입니다. 이 시기 약 10년 간 글라이신 브랜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슈는 "ASUAG"의 글라이신 브랜드 인수와 소유의 이전 이었습니다.

반면 당시에는 시계 다이얼에 야광 재료로 라듐(Radium)을 사용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1898년 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발견된 라듐(Radium) 사용 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이 되었을 때 워치 메이커들은 이 자체적으로 발광을 하는 기적의 소재를 야광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사능 유출 위험이 없는 트리튬(Tritium)소재로 대체되기 전 까지 당시 모든 시계의 바늘과 인덱스는 자체 발광 소재인 라듐(Radium)으로 칠해졌습니다.

라듐 걸스 'Radium Girls' 와 같은 슬픈 현실과 같이 불행히도 인류가 실제 라듐 (Radium)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 전까지 많은 이 라듐은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중 믿기 힘든 사실은 믿기 힘든 사실은 노화 방지 크림, 체중 감량 약, 치약, 물 등 라듐(Radium)을 함유한 일상 용품이 인기를 끌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라듐(Radium)의 과다 복용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The golden age of Glycine  

1942년 11월, 글라이신(Glycine)의 소유주인 페르난도 앵겔 데지빌 (Fernand Engel d'Eggiwil)이 세상을 떠났고 찰스 헤르티그 데빌라드(Charles Hertig d'Evilard)가 글라이신을 인수하였습니다.

찰스 헤르티그(Charles Hertig)는 당시 글라이신의 소유주 이자 'Lange watches'를 위한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Altus Watch Company의 소유주였고, 후에 'Certina'의 전신인 'Kurth Freres' 역시 그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데빌라드 가족 (d'Evilard Family)은 1984년, 아버지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성공적으로 글라이신을 운영해 왔습니다.

헤르티그(Hertig)는 글라이신 인수 이후 한 지붕 안에서 글라이신(Glycine)과 알투스(Altus)를 함께 운영해왔지만 20년 후인 1963년 8월 낭만적인 결혼을 발표하듯이 글라이신과 알투스 두 회사의 합병을 결정하였습니다.

1942년부터 1984년까지 헤르티그(Hertig)가 글라이신의(Glycine)을 항해한 시간은 가장 찬란했던 글라이신 시계 역사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The year of Airman, 1953


에어맨(Airman)은 글라이신의 가장 대표적인 시그니처 타임피스 입니다. 글라이신은 최초의 멀티 타임 GMT 워치이자 24시간 회전하는 베젤의 시계 에어맨을 전 세계에 선보였습니다.


파일럿들을 위해 파일럿이 만든 에어맨으로 인해 글라이신은 1960년대 중반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맞이했으며 수 많은 공군 파일럿들을 위한 타임피스로 전 세계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953년 7월 14일 여객기 안 단순한 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From good to great, the '60s


글라이신의 대표 모델인 에어맨은 글라이신의 제조 및 유통 역량을 성장시켰고 이에 부응해 1964년 헤르티그 주니어(Hertig Jr)는 전략적으로 미국으로 직접 이주하여 글라이신 공식 서비스 센터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65년 11월 베르너 지그리스트(Werner Siegrist)가 워치 메이킹 학교를 수료 후 글라이신에 합류하고 얼마 뒤 찰스 헤르티그 시니어 (Charles Hertig Sr)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를 잃은 헤르티그 주니어 (Hertig Jr)는 미국에서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글라이신은 2년간 잠재력이 풍부한 미국 시계 시장을 떠나게 됩니다.

베르너 지그리스트(Werner Siegrist)는 글라이신의 마스터 워치메이커로써 업무를 빠르게 습득해 나갔고 2년 뒤인 1967년 다시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글라이신(Glycine)의 이사인 사무엘 글러 (Samuel Glur)는 24시간 베젤을 개발하고, 대표 모델인 에어맨을 출시한 공신이었으며, 반드시 주목해야 할 위인입니다. 글라이신이 에어맨을 성공적으로 유통할 수 있도록 회사의 재무 상태를 건전하게 관리했으며, 그의 관리 하에 에어맨 SST(Airman SST), SST 크로노그래프 (SST Chronographs), 컴뱃(Combat) 및 커컴프레서(Compressor) 모델이 탄생하였습니다. 또한 1970년대 초반 글라이신 디지털 모델을 출시하였고, 쿼츠 파동으로 사라진 수많은 스위스 시계 제조 회사들과는 다르게 글라이신이 역사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Airman in CONUS, Werner Siegrist

당시 전 세계적으로 판매된 모든 글라이신 에어맨은 오직 스위스 비엔느 본사 (Bienne HQ)에서만 After Services가 제공되었습니다. 글라이신(Glycine Airman)의 메뉴얼은 서비스 주기를 '13,000시간 또는 18개월'을 권장하였고,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글라이신 케이스는 운송 중 시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제작되었습니다.

1964년 글라이신은 미국에 글라이신 공식 서비스 센터를 설립하지만 찰스 헤르티그 시니어의 사망으로 1965년 미국 서비스 센터의 운영을 중단하였고 2년 뒤인 1967년부터 2012년까지 원더킨트 베르너 지그리스트(Wunderkind Werner Siegrist)가 다시 미국에 파견되어 글라이신 공식 서비스 센터를 재개하였습니다.

베르너 지그리스트는(Werner Siegrist) 45년 간 미국 글라이신 서비스 센터를 하나 하나 인수하였고, 결국 전 지점을 인수한 이 후 자신의 브랜드인 'Falcon'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Falcon'을 설립한 이 후 에어맨의 쿼츠 모델을 만들기 위해 사무엘 글러(Samuel Glur 이 후 Hans Brechbuhler)와 특별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현재까지 글라이신의 에어맨이 미국 시장 전역에서 살아 숨쉬는 이유는 지그리스트(Werner)의 45년간의 숭고한 헌신 덕분입니다.

Glycine Vacuum, 1961


1959년 글라이신을 위해 헌신했던 판매 사원인 한스 울리히 클링겐 베르크 (Hans Ulrich Klingenberg)는 우연히 시계 케이스를 진공 상태에서 밀봉하면 윤활유가 마르지 않고 공기, 물, 응결 등이 시계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막아 시계의 수명이 연장되고 관리가 수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클링겐 베르크는 알게 된 사실을 글라이신에 강하게 주장했고 글라이신은 극한의 조건에서 장기간 사용 가능하며, 정확성, 방수, 방진, 충격에 대한 놀라운 저항력이 특징인 VACUUM 크로노미터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진공 기술인 베큠(VACUUM)이 적용된 시계는 현재에도 건재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정확합니다. 클링겐 베르크(Klingenberg)는 글라이신 역사의 타임라인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베큠 워치 (Vacuum watches)를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베큠 전용 monobloc case를 다룰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시계와는 달리 다이얼 방향으로 무브먼트에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숙련된 기술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VACUUM 진공 특허(1959년 출원 CH 355742, 1961년 등록)는 클링겐베르크(Klingenberg)의 명의로 등록되었고, 베큠 시계의 케이스 백에 새겨져 있습니다.

클링겐 베르크(Klingenberg)는 1966년 1월 5일 Statut Horloger (스위스의 새로운 시계 회사 설립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보호주의 카르텔)이 만료된 이후 글라이신을 떠나 Vacuum Chronometer Corporation과 'Century Time AG' 를 설립하였습니다.

1975년에 생산된 일부 글라이신 시계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중 'C' 로고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클링겐 베르크( Klingenberg)의 회사 'Century Chronometers'를 의미합니다.

그가 제작한 모든 시계는 COSC 인증을 받았고 현재에도 글라이신 및 기타 시계 제조 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Glycine Airman in space, 1965

1965년 글라이신 에어맨은 우주 비행사 찰스 콘라드(Charles (Pete) Conrad)와 NASA 프로젝트 제미니 5호 (Gemini 5) 미션을 함께 하기 위해 우주에 진출했습니다. 

콘라드는 (Conrad)는 미 공군 파일럿이자 글라이신 에어맨(Glycine Airman)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콘라드는 제미니 5호 (Gemini 5) 미션에서 동료인 고든 쿠프 (Gordon Cooper)와 함께 우주 소비에트 기록 5일을 넘어서는 8일이라는 새로운 우주 신기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콘라드는 이 미션을 '쓰레기통 속의 8일'이라고 부름.


콘라드는(Conrad)는 글라이신 에어맨과 오메가 스피드 마스터를 함께 착용 후 제미니 5호 미션을 수행했고 1965년 8월 29일 콘라드가 미션을 마치고 대서양에 착륙 후 USS Lake Champlain에 이송 되었을 때 콘라드의 우주복 안 손목에는 글라이신 에어맨과 오메가 스피드마스터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제미니 5호 (Gemini 5)의 임무는 에어맨이 150,000피트의 급격한 압력의 변화를 견딜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이런 뜨거운 관심을 받은 이벤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라이신은 아무런 마케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글라이신이 오메가보다 유명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글라이신은 헤르티그 시니어의 죽음으로 회사를 재정비하는 시기였고, 미국 시장을 관리하는 CEO의 부재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Glycine Combat and the Crown logo, 1967


1965년 글라이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왕관 로고를 서서히 시계에 새기기 시작하였고,1967년에 이르러 생산된 대부분의 글라이신 시계에는 새로운 왕관 로고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글라이신은 파일럿을 위한 시계 에어맨의 신화를 이어 파일럿이 아닌 사람들('Landman'이라고 당시에 불리기도 했습니다)에게도 글라이신을 소개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글라이신은 파일럿이 아닌 사람들('Landman'이라고도 불리는)을 컴뱃 ‘Combat’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컴뱃 'Combat'은 군대, 스포츠 및 산업 전반에 종사하는 모든 까다로운 남성들을 위해 설계, 제조, 유통되었고 글라이신 컴뱃 'Combat'의 매뉴얼은 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에어맨과 동일한 세컨즈 해킹 메커니즘(12시 방향에 핀이 있는 형태)이 구동하는 글라이신 컴뱃 'Combat' 은 에어맨에 이어 두번째로 역사 깊은 시리즈이며 EPSA Compressor 케이스를 적용해 글라이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Boeing vs Concorde vs Tupolev


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년대 세계 질서는 민주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양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시대가 지배했습니다. 

두 강대국 간 직접적인 대결은 없었지만, 전 세계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몰아넣었고 당시 인류는 "가장 빠르고,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라는 가치를 위해 몰두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초음속 제트기인 SST (SuperSonic Transport) 기술 분야에서의 경쟁은 초두의 관심사였고 마치 카 레이싱 경주 처럼 참가 선수들 역시 치열했습니다.

초음속 제트기의 선수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프랑스의 "Aerospatiale" 영국의 "British Aircraft Corporation"의 협력 하의 탄생한 영불 합작 콩코드 "Concorde"

2. 미국의 보잉 2027 "Boeing 2707"

3. 러시아의 투폴레프 TU 144 "Tupolev TU 144"


1969년 6월 프랑스 에어 쇼가 열렸고 러시아의 투폴레프 TU 144 Tupolev TU 144와

영국, 프랑스 합작 콩코드 Concorde의 프로토 타입이 선보여 졌으며 당시 미국은 보잉 2027 "Boeing 2027"의 프로토 타입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수 많은 기대 속에 1973년 프랑스의 에어쇼가 다시 열렸으나 불행히 쇼 비행을 하던 중 투폴레프 TU 144(Tupolev TU 144)가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SST(SuperSonic Transport) 프로젝트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투자자들은 이 일로 불안함을 느꼈고 대중들 역시 SST(SuperSonic Transport) 프로젝트에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SST(SuperSonic Transport)로 인해 소닉 붐, 이륙 소음 및 오염과 같은 문제점들로 결국 인류는 초음속 제트기에 대한 인식을 바꿨고, 자금 문제와 더불어 미국 상원 역시 SST 보잉 2027( Boeing SST) 프로젝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콩코드 역시 SST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를 개선해야 했으며 몇 년을 더 기다린 후 1976년 첫 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GLYCINE AIRMAN SST & BOEING 2707 SST PROMO FILM FROM 1967


The origins of the Glycine Airman SST case-back markings : Boeing 2707 click video to watch ( youtube video )

글라이신은 Flagship 플래그십 아이템이자 상징적인 시계 에어맨으로 인류의 꿈을 반영한 SST를 상징하는 시계를 출시하기로 결정했는데 미국의 비행을 상징하는 클래식한 이미지로 에어맨의 디자인을 다양화하기 위해 보잉 "Boeing" 2027을 선택했습니다.


1967년 글라이신은 Boeing 2707을 케이스백에 새긴 Airman SST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불행하게 중단된 미국의 초음속 제트기 SST 보잉 Boeing 2707 프로젝트는  글라이신 시계로써 상징적인 의미로 기념되었습니다.


SST는 인류의 꿈이었고 그 꿈은 우리 시계에도 남았습니다. 이는 글라이신 에어맨 SST Glycine Airman SST(일명 'Pumpkin') 케이스백 마킹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1967년 대중이 SST를 어떻게 인식하고 미래에 무엇을 기대했는지 위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Airman SST and Chronographs, 1969


SST(Supersonic Transportation)는 60년대에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마하 1 이상을 비행하는 여객기를 제조한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에서 충격적인 혁신이었습니다.

글라이신은 에어맨 SST라고 하는 특별한 타임피스로 이 시기를 표현합니다.

SST용 글라이신의 미래 지향적 색상은 주황색이었고, 따라서 이 모델은 '호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의 인기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수동 와인딩 크로노그래프의 시대는 종말을 알렸습니다. 

글라이신은 1969년 Valjoux 72(x), Valjoux 773(x) 및 Landeron 18(x) 무브먼트를 출시했고 매우 제한된 크로노그래프만 제조했습니다.

Glycine Compressor, 1967


Ervin Piquerez(EPSA)는 1953년 10월 '압축 케이스' 특허 CH313813를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시계 시장에서 이 압축 케이스가 왜 좋은지 이해하는 데에만 수 년이 걸렸고, EPSA의 압축 케이스 기술이 적용된 시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개발의 핵심 포인트는 시계의 케이스백을 여러 단계에 걸쳐 압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계 케이스에 압력이 가해지면 가해질 수록 더 견고하게 케이스가 밀봉 되었기 때문에 당시 생산된 대부분의 브랜드 다이버 시계는 EPSA 케이스로 만들어 졌고 에어맨 역시 비행기 기체의 급격한 압력 변화를 견디기 위해 압축 케이스 기술을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글라이신은 에어맨 및 컴뱃 외에도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압축 케이스 기술이 담긴 수 많은 Compressor 모델을 제조하였습니다.

Quartz crisis, the '70s


1970년대에는 시계 시장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해입니다. 많은 이에게는 종말, 어떤 이에게는 진화, 누군가에게는 기회. 쿼츠 시계가 발명되면서 배터리로 구동 되는 시계가 기계식 메커니즘이 주를 이룬 스위스의 워치 메이킹 산업을 강타했습니다. 이를 쿼츠 파동이라고 명명합니다.

점점 더 많은 소비자들이 훨씬 더 저렴하고 훨씬 더 정확한 일본의 쿼츠 시계를 선택했습니다. 1970년대 전반기 수 많은 스위스 시계 제조 회사가 시장에서 사라지고, 파산하고. 보다 큰 기업에게 회사를 매각했습니다. 

하지만 글라이신은 이 파란 만장한 시기에 쿼츠, LED, LCD 및 전자 시계를 출시하여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Ditronic, 1972


1972년 1월 초, 다섯 명의 사람들이 Nidau, Bienne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있었습니다.

Glycine & Altus, Wyler, Milus, Delvina 및 Buttes 시계 회사의 오너들은 최신 트렌드인 LED 시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고 슬프게도 그들은 추세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기계식 메커니즘 시계에서 전자식 기술 제조로 방식이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uttes Watches 오너는 84세의 늙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새로운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면 회사를 잃게 될 것이고, 변화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닙니다....'


1972년 3월 11일' Ditronic '이 탄생했습니다. 연간 매출액이 약 5000만 스위스 프랑크인 5개의 기업이 한데 뭉쳐서 LED 시계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Samuel Glur는 이미 성공적인 Airman 출시로 미국 시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Ditroni의 디지털 시계를 생산하기 위해 미국 뉴저지의 Optel Corporationd을 주선 하였지만 언젠가는 시계 제조업이 스위스 밸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합작 법인은1972년 4월 Baselfair에서 Ditronic 시계 라인을 선보였으며 글라이신은 Quartz 파동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이 사건은 Samuel Glur이 글라이신에 기여한 마지막 공헌이었습니다. 그는 1974년에 세상을 떠났고 Charles Hertig Jr는 1984년까지 홀로 지냈습니다.

Glycine History 1984 - 2014



The recovery and new millennium, large diameter watches introduction of Incursore, KMU, Lagunare, Altus Chronograph, 

Eugene Meylan and  Glycine Airman SST re-editions

  THE BRECHBUEHLERS  

글라이신의 오너인 한스 브레히 브엘러(HansBrechbuehler) 그의 딸인 캐서리나(Katherina Brechbuhler는 글라이신이라는 선박의 항해사로써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안전하게 항해했습니다.

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글라이신에 더 다양한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고 보다 크기가 큰 글라이신 타임피스를 연이어 출시하여 글라이신의 디자인적 트렌드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Hans & Katherina Brechbuehler, 1984-2011


GLYCINE AND THE BRECHBUEHLER FAMILY

1984년 "Belinda Watches"의 오너이자 전통적인 그랜드 워치 메이커인 한스 브레히브엘러 (Hans Brechbuehler, Charles Monnier SA)는 찰스 헤르티그 주니어(Charles Hertig Jr)로부터 글라이신(Glycine)을 인수했습니다.


한스는 글라이신의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을 고안하였으며 배터리로 작동 되는 쿼츠 글라이신 기계식 메커니즘의 오토매틱 글라이신 등 다양한 모델을 출시하였습니다.


또한 한스의 글라이신(Glycine)은 1996년 첫 공식 사이트를 런칭하였습니다.


글라이신은 KMU 48, F104 라인을 세상에 내놨고, Airman Double 24, SST 06, SST 크로노그래프, Lagunare, Incursore, Eugene Meylan 등 수많은 클래식 에어맨(Airman) 시리즈를 함께 선보였습니다. 또한 최대 53mm(Airman 7)의 큰 직경의 대담한 디자인의 타임피스 역시 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대담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한스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글라이신을 운영하기 위해 2002년 자신의 회사인 Belinda Watches를 어쩔 수 없이 매각했습니다.


한스의 딸인 캐서리나(Katherina)는 1992년 부터 한스와 함께 글라이신에서 일해왔습니다. 그녀는 2005년 한스로부터 글라이신(Glycine)을 물려받게 되었지만 2010년 한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 역시 업계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고 2011년 글라이신을 매각했습니다.


이듬해인 2012년은 베르너 지그리스트 (Werner Siegrist)가 1967년부터 시작해온 미국 글라이신 서비스 센터에서 헌신이 마무리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베르너(Werner)는 글라이신 안에서 45년 동안 헌신한 후 은퇴했으며 특히 자신의 브랜드 'Falcon'과 함께 CONUS 안에서 에어맨(Airman)을 개척하였습니다.


2002년 브레히뷜러(Brechbuehler) 시대에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와 아일랜드의 현지 회사가 글라이신의 모델 및 구성으로 글라이신의 모조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글라이신은 이탈리아에서 해당 사건에 대해 소송을 걸었고, 승소하여 해당 사인 Griggio SpA에서 만든 모든 글라이신 시계를 압수하였습니다.


위 사건에서 일어난 시계 중 일부는 현재에도 남아 간혹 해외 사이트에 출시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약에라도 해외 사이트에서 글라이신을 구매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위 비디오는 당시 한스 브레히뷜러(Hans Brechbuehler)의 글라이신(Glycine) 컬렉션을 소개하는 비디오입니다.

Stephan and Nicole Lack, 2011-2019


Lack Family는 캐서리나 브레히뷜러(Katherina Brechbuehler)로부터 글라이신을 인수했고 큰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Lack Family의 스테판(Stephan)은 Asia distribution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고, 근무할 당시 큰 이익을 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스테판(Stephan)의 재임 기간에 글라이신은 Airman AM/PM 모델의 60주년 기념 컬렉션을 출시했습니다.

특히 케이스 크기 36mm인 Airman No. 1은 그의 꼼꼼한 관리 안에서 만들어 졌고 Airman Airfighter는 수많은 헌정 모델들 중 가장 신선하고 논란이 많은 디자인이었습니다.


2013년 글라이신은 아시아 시장을 타겟을 잡고 활동하기 위해 Maurice Lacroix 브랜드 권리를 가진 DKSH를 인수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DKSH는 2016년 Invicta Watch Group과 계약을 맺고 주식을 매각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스테판은(Stephan)은 글라이신의 전통적인 왕관 로고에 날개를 달고 싶어했습니다. 전 세계 시계 커뮤니티의 글라이신 팬들이 달가워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는 로고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하지만 글라이신 로고에 날개를 단 로고는 알마니의 로고와 유사해 보이는 점이 있었고, 알마니(Armani)는 로고 유사성을 이유로 글라이신(Glycine)을 스위스 법원에 고소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ARMANI와 AIRMAN도 혼동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Airman' 단어와 글꼴에 대해 글라이신(Glycine)을 고소하는 황당한 일 역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법원은 로고에 대해서는 알마니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지만 당연하게도 1953년 등록된 특허와 유구한 역사가 있는 Airman의 단어와 글꼴에 대한 사건은 논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 후 글라이신(Glycine)의 모회사가 된 Invicta Watch Group은 이 사건에 대해서 항소했고 2017년 상급 법원이 글라이신의 손을 들어 글라이신의 새로운 로고 디자인이 알마니 로고와 관련이 없으며 서로 혼동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다행히도 항소에서 승소 했고 날개 달린 왕관 로고를 사용할 권리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Invicta Watch Group 은 기존의 클래식한 글라이신의 왕관 로고를 사용하기로 결정해 전 세계 수많은 시계 애호가 포럼, 커뮤니티 등에서 시계 팬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Invicta Watch Group이 새롭게 임명한 전무 이사 Daniele Andreatta 가 부임한 2019년까지 Family Lack은 글라이신에서 근무하였습니다.


Invicta Watch Group이 글라이신을 인수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 시계 포럼과 시계 매니아 플랫폼을 강타했습니다.

이제 글라이신이 어떤 미래를 보여줄지, 어떤 역사를 기록할지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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